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 (문단 편집) === [[반공]], [[반파시즘]] === 살라자르 정권은 [[우파]] [[반공]] [[가톨릭]] [[교권주의]] [[독재]]체제였지만 살라자르 본인은 [[파시즘]]의 열광적 대중동원이나 대외적 팽창주의를 혐오하며 [[안빈낙도]]를 추구했다. 가톨릭교회를 통한 사회 통제란 면에선 부분적으로 [[전체주의]]적인 면도 있었고, [[스페인 내전]]때는 [[보수주의]] 이데올로기 동지였던 프랑코 진영으로 만명 규모의 고대 [[루시타니아]]의 반로마 지도자의 이름을 딴 [[비리아투스]] 군단 의용병을 파병하기도 했다. 프란시스쿠 홀랑 프레투가 이끌던 포르투갈 [[파시즘]] 운동과도 한동안 제휴했으나 2차대전이 발발하면서 깔끔하게 권력의 중심에서 내쳐버렸다. 일종의 [[우민화 정책]]과도 유사하게 연결되는데 살라자르 본인은 국민들이 어떤 특정 [[이데올로기]]나 정치 운동의 영향을 받는것 자체를 원치 않았다. 따라서 [[나치 독일|독일]]이나 [[파시스트 이탈리아|이탈리아]]에서 흔했던 거대한 대중동원과 정부-파시스트 정당 체제 일치는 있을수 없는 일이었다. 특히 [[나치]]의 [[인종주의]]와 [[반유대주의]]에 대해서는 살라자르 개인이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공개적으로 [[혐오]]하는 입장이었고 포르투갈은 2차대전때 표면적으로는 중립을 지켰지만 거의 백만에 가까운 유럽 [[유대인]]들이 포르투갈을 거쳐 미국 등으로 무사히 탈출할 수 있도록 적극 협력했다. 대전 중반에는 확실히 연합국 쪽으로 기울어진 행보를 보였다. 자본가들도, 공산주의자들도 전부 [[유대인]]이랍시고 거품물던 전간기 유럽의 [[파시스트]]들과 여전히 18세기적 전근대 사회로 복귀를 추구하던 초보수주의자들은 상당한 부분에서 시각을 공유했다. [[보수혁명]]론의 근간이 되기도 했다. 이렇기 때문에 [[파시즘]]을 다루는 학술 서적 등에선 의례적으로 나치 독일, 파쇼 이탈리아의 사례 이후 [[스페인]]의 [[프랑코 정권]]과 함께 부록으로 살라자르 정권을 언급하는 것이다. 그러나 [[히틀러]], [[무솔리니]] 같은 파시스트들과는 달리 살라자르는 기존 식민지의 유지를 넘은 [[군국주의]], 팽창주의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, 나름 뒤틀린 의미에서 과학기술이 상징하는 근대성을 긍정하며 개발주의를 추진하지도 않았으며, 가톨릭 정체성을 강조한 것 이상으론 전체주의적 대중동원을 오히려 혐오했고, 심지어 늘 따라다니는 프랑코와 비교해서도 정권의 폭력성이나 억압성이 확연하게 차이났다. 그래서 '파시즘 아닌 그냥 권위주의적 우파 군사독재자이다' vs '정권의 차원에서는 학술적으로 [[파시즘]]이 맞다'라는 의견 대립이 팽팽한 프란시스코 프랑코 정권의 평가와 달리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의 [[포르투갈 제2공화국]]은 '''확실히 [[파시즘]]은 아닌 단순한 [[권위주의]] [[우파]] [[독재]]였다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.'''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